T/뮨
최김/준호범신 :: 타살
annina
2016. 2. 11. 11:03
가늘지만은 않은 목을 부여잡고, 최준호는 그리도 서럽게 울었다. 세상에 더는 없을 그런 사람을 보내는 듯이, 이제는 다시 없을 이. 범신이 스스로 저 아래로 가려 하는 걸 막아선 건 자신이었으나, 준호는 끝내 손가락 끝을 떨어댔다. 목덜미 위의 솜털이 바짝 서서는 준호를 막아 세웠고, 범신은 왜 그렇게 따뜻한 몸을 하고 있었던 건지. 결국 그의 위에 탄 채로 준호는 밤새, 그 마른 나무 장작 같은 몸 어디에서 그런 양의 수분이 나오는지. 준호는 범신을 흠뻑 적신 채로 잠들었다.
범신은 또다시 죽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서울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범신은 그의 기차가 달려오는 것을 내려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철도는 덜커덕거리고, 내리 꽂는 빗방울이 누굴 적시려 드는 건지. 범신은 머리를 저었다. 이곳에 내려가면 분명 순식간일테지만 주변에 민폐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범신은 얌전히 기차칸에 올라탔다. 창 밖의, 기차를 기다리는 이들과 눈이 마주치자 범신은 잇새로 작게 웃었다. 죽을 몸이면서 다른 사람 걱정하기는. 그 오지랖때문에 사람 하나 죽이지도 못하는 부제 끌고 다녔더라지. 시린 눈을 감은 채로, 그는 누구에겐가 한탄했다.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늙은이 하나 못 죽이냔 말이다.
범신은 그가 준호에게 몹쓸 짓을 시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시킨 것은, 준호가 자살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았다. 스스로를 꺾어, 평생 죽을 놈처럼 살아가라. 범신은 그와 비슷한 요구를 준호에게 했고, 그 여리디여린 놈은 고작 그거 하나 받아드리지 못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졌더랬다. 범신은 기차역에 내리자 마자 흡연할 장소부터 찾았다. 번화가에 그런 장소 흔할리 없었고,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곳은 저와 같은 아저씨들로 발 디딜틈 없이 가득했다. 그는 담배갑만 구겨 쥐고는 아무 곳에나 시선을 던졌다. 거리를 뒤덮은 뻘건 십자가나, 되도 않는 설교사들은 이제 범신에게 어느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결국 범신은 쓰레기 냄새가 만연한 구석에 자리 잡고는 사람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 가느다란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뭉툭한 손가락 사이로 하얀 연기와, 담뱃재가 서로 반대 방향을 이루며 범신에게서 사라져갔다. 사소한 희생이라... 고작해야 자신이 뭐라고 그리 삶에 집착하는 것처럼 대했는지. 범신은 자조하곤 불붙일 때만 물었던 담뱃대를 바닥에 비벼 껐다. 삶에 집착하고 반항해야 할 건 너였다. 내가 아니라.
범신은 되는 대로 아무 모텔이나 잡아 들어갔다. 연말이라 그런가, 아니면 여기 물가가 그런가 여관보다 배는 비싼 모텔 키를 손에 쥔 채, 그는 컴컴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랐다.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키를 부수듯이 넣어 비비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은 지 열은 훌쩍 지나서 범신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키를 대충 꽂아서 점열하며 켜지는 불빛을 바라보다, 범신은 조금 신경질적으로 키를 내리 눌렀다. 팍 하고 켜진 불은 모텔이 아니라, 병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밝아서 범신은 그저 키를 뽑아들었다. 다시 찾아온 암흑에도, 범신은 익숙하게 옷가지를 던져 벗고는 깔린 두 장의 이불 중, 출입구가 가까운 왼쪽에 자리한다.
새벽 밤 중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잠을 깬 범신은 다시 욕지거리를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텔 특성상 두꺼운 커탠 틈새론 빛 하나 투과 되지 않았음에도, 범신은 익숙한 곳인 양 속옷 차림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 밝지만은 않은 복도를 등지고, 광원처럼 밀고 들어온 준호에게 범신은 아무런 말 않았다. 그리도 뱉어내던 욕지거리와 한숨들도 어디로 간 것인지, 범신은 그저 헝클어진 머리 만지며 다시 젖혀진 이불 새로 들어갔다.
준호는 나무로 된 탁자 테이블 앞, 담배 구멍으로 너덜대는 지푸라기 의자에 앉았다. 휜 등을 자랑이라도 하는지, 새우 마냥 엎어져 자는 그를 준호는 하염없이, 그가 깨어날 때까지 바라보았다. 좀이 쑤실 만도 했으나, 준호는 눈 하나 제대로 의식적으로 깜빡이지 못했다. 타는 입술만을 핥으며, 준호는 자신의 하나뿐인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 이외에는 누구도 자신의 사람으로 둔 적이 없는데, 그런데도 그는 떠나겠다 하니... 준호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자신의 하찮은 이에게 연민이라도 느끼려 노력했다. 그러나 느는 건 오히려 괘씸함 뿐이고, 분노만이 그에 대한 감정을 대체했다. 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은 다름 아닌 저로, 지금 이 상태라면야, 기꺼히 자해든, 자살이든 거뜬할 것만 같은 데 그는 도저히 일어난 기미가 안 보였다. 그것 또한 그와 너무나 잘 어울려서, 준호는 그를 대신해 한숨 쉬었다.
서성거리는 준호를 본채만채하며 범신은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왔다. 준호는 그가 들어간 사이 범신의 짐을 뒤적여 혹여 그 혼자 죽거나, 혹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 법한 물건을 다 자신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준호는 가방을 가져오지 않은 걸, 그제야 후회하곤 자기 주머니 속 볼펜 등을 다시 서럽게 바라봤다. 그리 하여 파헤쳐진 짐을 다시 싸맬 생각도 못하고 있던 차에 범신이 가운을 걸치고 나오자, 그는 자리를 비켜 다시 그, 낡아 빠진 의자로 돌아갔다.
햇볕 한 줌 들어오지 못하는 방에서, 준호는 자해가 아닌, 자살미수의 흔적들을 범신의 몸에서 찾아내었다. 작지만 깊어 보이는 손목 자국, 같은 목줄기에 연속적으로 나있는 흉터들. 나무의 나이테 마냥,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깊어 어느 누가 나서서 바꿀 수 없는 상처가 준호의 눈을 현혹했다. 언젠가 헐렁한 런닝 안으로 보았던 매독 자국은 말끔히 지워진채로... 그러나 그 자리에 다시끔 차버린 살이 바로 자살 충동이라는 종양이었다. 그 지독한 성병보다 더욱 지독한 단 내가 그에게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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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의 이유로 홀로 죽지 못하는 김범신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