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아재
그래상식 :: 베일
annina
2015. 2. 8. 14:11
베일을 걷어 올린다는 건 지켜준다는 걸 의미한다고 합니다.
물소리가 들렸다. 비몽사몽인 가운데, 옆자리의 서늘함은 익숙하지 못한 감각이었다. 늘 옆에 누워 있는 사람보다 늦게 일어나기는 하지만, 물소리로 일어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굳이 떠올려보자면 왼손 약지가 묵직해지기 전, 지금과 같은 상태일 때.
좁은 단칸방은 빈 종이상자가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어제 장그래와 밤새 술을 마시며 정리했던 탓에, 옷이나 책 등은 엉망으로 꽂혀 있었지만 별로 생각은 없었다. 들쑥날쑥인 책장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침대에 앉아 햇빛을 받고 있자니, 화장실 문이 열리며 장그래가 나왔다.
"내가 너랑 어제 얼마나 마신거냐?"
"차장님 혼자만 해도 2병 반 정도 드신것 같은데요."
장그래는 어디서 찾은 건지 하얀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에, 굳이 씻을 생각이 들지 않아 침대에 다시 눕자, 침대가 한쪽으로 기우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나를 보고 있는 장그래와 눈이 마주쳐서,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았다.
"뭐."
"아뇨, 그냥 아침에 차장님 보는 게 처음이라서요."
나는 가볍게 웃고는 장그래를 보았다. 하지만 장그래는 오히려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차장님이 그렇게 웃는 거 별로예요."
"왜? 내 웃는 게 어때서?"
자조적으로 웃으시는 거요. 라고 장그래가 말해서,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그래는 어제 다 정리하지 못한 이삿짐을 정리했다. 원래 같으면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그냥 장그래의 뒷모습이 보기 좋아서 누워 있기로 했다. 장그래는 운동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의외로 몸이 좋기도 했고, 그에 걸맞게 체력도, 힘도 꽤 있는 편이었다. 직접 체감하니, 장난 아닐 정도로 젊기도 했고.
나는 늘어진 내 팔뚝을 보며 음. 하고 신음했다. 그 소리에 장그래가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길래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 저었다. 그럼에도 장그래는 정리하던 상자를 내려놓고 내 가까이 와서 내 이마를 짚었다.
"열 있으신 거 아니에요? 얼굴이 빨가신데."
"얌마, 그런 거 아냐. 그냥…. 햇빛 받고 있어서 그래."
나는 되도 않는 말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장그래가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보기에, 나는 괜찮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그래도 어제 좀 무리하셨잖아요. 술도 꽤 드셨으면서. 누워 계세요. 제가 다 정리하고 깨워 드릴 테니까."
그러면서 내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곤, 나도 모르게 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차장님, 밥 먹고 주무세요."
잠을 깬 건, 장그래의 목소리 탓이었다. 가볍게 어깨를 흔드는 손길도. 눈을 떠 보니 여전히 어두운 이불 안이었다. 순간, 가려져 있던 빛이 안으로 들어오며, 이불이 걷어졌다. 빛무리와, 장그래가 이불 안으로 내려오며 나를 일으켰다. 갑자기 빛을 봐서 그런지 눈이 따가워,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눈물이 한참을 흘렀다.
나를 일으킨 채, 끌어안은 장그래가 그 시간 동안, 눈을 가려줬다.
이혼한 오상식이 혼자 집 정리하는 데, 이번엔 허락 없이 쳐들어온 장그래랑 술 마시면서 짐정리하고는 같이 잤다고 합니다.
베일 대신 이불을 쓰긴 했는데, 미묘하네요...
어쨌거나 오상식이 누구앞에서 엉엉 울고 그럴 것 같지도 않지만, 그냥, 우는 게 보고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