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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뮨

최김 :: 마이동풍


※주요 캐릭터 사망요소 주의







바닷물에 담금된 쇳물 마냥, 열기는 내부에만 존재할 뿐 차가워진 겉껍질에 막혀 표출되질 못했다. 염분은 날 녹슬게 했지만, 날 단단케 해주진 않았다. 깨어져가는 외피들이 바도에 쓸려가는 것을 나는 보기만 했다. 그렇게 깨어지고, 무뎌져가는 것이 내 소명이었다. 내가 선택해야만 했던 유일한 생존법이었다. 그러나,

벗어나질 못하고 오늘도 평소와 같은 꿈을 꾸었다. 그 안에서 묵직하게 남는 손 맛은 아직도 살덩이를 파헤치고 있었다. 내가 휘두른 날붙이에서 튀어, 얼굴에 닿던 뜨거운 피가, 새벽 공기에 아주 천천히 식어갔다. 나는 오늘도 내 동생을 죽였다. 덤덤히 오늘 시간표를 떠올리면서도, 더는 잠들지 못하고 해가 떠오르기만을 빌었다. 그 강렬함이 색채가 무딘 달을 물리쳐 내길.

점심 공강에 사둔 빵을 입에 물고, 햇빛이 제일 잘 드는 벤치에 앉았다. 잠을 설친 탓에 노곤한 것이, 입맛이 돌지도 않아 빵을 옆에 내려 놓았다. 사람들이 와글거리며 쏟아 나오지 않는 무기력한 학교는 자신만이 삶을 즐기는 것 같이 한 점의 봄바람도 불지 않아서, 이곳 사람들은 어디에 홀려질 까닭도 없었다. 그러나 일부러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인지, 이곳 사람들은 바람이 불더라도, 그를 무시하려 들었다. 자그마한 바람 조각도, 꽃잎이 뒤섞여 흩날리는 봄바람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리고 자신에게도 아무것도 아니어야 할 그 바람은, 7년이 지나 내게 몰려왔다. 거센 꽃폭풍은 내가 더 이상 지상을 밟고 서있지 못하게끔 했다.

차마 뛰지는 못하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어둑해진 하늘을 엿보았다. 겨우 내에 짧아진 해만큼이나 길어진 밤은 두려운 존재였다. 건물들 사이로 스러져 가는 해를 끝까지 쫓은 다음에야, 나는 기숙사로 돌아갔다. 붉은 하늘은 주인을 잃고, 일방적으로 침입당하고 있었다.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가자, 커탠을 쳐두어 어둑해진 방이 나를 반겼다. 그대로 들어가 커탠을 잡아뜯듯이 열었으나, 방은 더 이상 밝아지질 않았다. 손톱을 물어 뜯으며 스탠드를 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대충 벗어둔 가방을 뒤지려 돌아보자, 거기에 사람이 죽은 듯 누워있었다. 그 사람이야 말로 수단을 입은 봄바람이었다.

그의 늘어진 손에 얼굴을 기댄채,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돌아나가질 못할 미로에 갖혀 있었다. 그도, 나도 이 관계에 무언갈 바라지 못하고 이렇게, 단지 이렇게. 옆에 있어 주길. 그의 손 등에 입을 맞추며 성호를 그었다. 바스라질 허무한 이에게, 빛을 내려 주시길. 그리고 없어져 갈 그를 바라볼 내게도, 빛을 내려 주시길.

잠에서 깬 그와 싱거운 대화를 나누다, 그의 눈동자에 머물고 있는 염려를 알아챘다. 추궁하는 그에게 잠을 못잔다고 중얼대자, 그는 내게 기도문을 외워 주었다.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노래하듯 퍼지는, 낮디 낮은 목소리가, 내게 숨을 쉬게 했다. 그 때까지도 기대어 있던 그의 손은 문장이 끝날 때마다 내 빰을 가볍게 두드렸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 터인데, 입에선 단지 '지금은 9월이 아닌데요?'하는 우습지도 않은 말이 나왔다. 무안한 듯 안경을 치켜올리는 그를 보고 웃자, 그 또한 나를 보고 웃어 주었다. 그는 나를 쥐어박는 시늉을 하더니, '순교자의 달 아니면 안 기릴 꺼냐?' 하는 등의 농을 건내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눈을 감으며, 강아지라도 되는 양 그의 손에 나를 맡겼다. 이런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


아무리 봄바람이 몰아쳐도, 그것이 눈보라가 되기까지는 한순간이었다. 스러진 그를 보내면서도, 나는 어느 하나도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우리가 보냈던 한순간이 마치 꿈인 양, 더는 봄을 떠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일까. 그의 까맣고 광택나는 관은 그에게 지독히도 어울리지 못했다. 빛나지도, 까맣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내 옆에서 그는 마모된 갈색의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의 여동생이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서 통곡을 하는 게, 귀에 물이라도 찬듯 먼곳에서 들리기만 했다.

그가 병상에서 건내준 그의 묵주가 주머니에서 짤랑이며 움직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눈 앞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도, 심장이 세게 뛰는 것도, 그 묵주를 손에 쥐자 모두가 괜찮아졌다. 차게 식었을 손이, 묵주와 닿는 순간 화해지는 것을 느꼈다.

목에 걸린 로만칼라가 처음으로 무거워지는 날이었다. 관은 무겁지 않았으나, 장지로 가는 길이 무거웠던 마냥. 나는 모양이 같은 그의 묵주와 내 묵주를 겹쳐 두었다. 누군가에게 전해줄 일 없이, 그대로 겹쳐 두었다. 서로가 한 몸인 것처럼,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게 겹쳐진 묵주 위로 파도가 쳤다. 다 헤져버려 뜨거운 곳도 남지 않은 쇠붙이는 그 묵주들, 생명줄에 매달려 목숨을 연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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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자다 깨시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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