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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뮨

최김/준호범신 :: 상처난 유리잔


※최신부 김부제AU





나는 수일간 전화 목소리만을 아는 사내를 찾아다녔다. 겨우 수도원장님의 전화에 그 철문을 열어 다가가면, 그는 빈 찻잔만을 내밀고는 다시 어디론가 가버린 후였다. 찍찍대며 늘어지는 빗소리가, 다가오는 기한처럼 내 목을 조르고만 있는 듯했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달 모양, 그림자, 그리고 떨어지는 낙엽들처럼. 놀리듯 이어가는 전화에 같잖은 신부는 여자를 함께 있을 때도, 혹은 비명을 뒤로할 때도 있었고, 그는 언제나 평온하다 못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대했다.

토해라. 그 목소리는 처음으로 낮았고, 처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말투였다. 나는 토닥이는 온기에, 다시 위벽을 밀어 올렸다. 고작해야... 고작해야 핏덩이였다. 조금만 잔인한 영화를 봐도 저것보다 훨씬 처참한 광경에 직면할 수 있을 텐데, 나는 풀린 다리를 팔로 지탱한 채 무엇도 보지 못했다. 하얗고, 까만 시야 위로 빨간 샐로판지가 덮이자 나는 다시 빈속을 비웠다. 그리 마음을 잃고 다시 깨었을 때, 곁을 지키던 온기와, 담배 냄새는 자취만을 남긴 채 다시 집 안으로 향해져 있었다. 마치 내 머릿속 마냥, 빠르게 번쩍이는 불빛이 커튼으로 막힌 집안에서 흘러나오고, 나는 그저 환한 가로등 아래에서 내 토사물의 향기를 맡으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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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발걸음 소리 들으며, 수단을 헐겁게 입은 사내는 손때가 타 거무죽죽한 십자가를 눌러 비린내가 심한 시체의 위에 눌러 박았다. 내장, 뼈가 다 보이는 시체는 그런 모습을 한 채로, 신부의 죄목을 낱낱이 밝히려 들었으나, 이 또한 이전의 그 무수했던 시도들처럼 무의미해 보였다. 그 하찮은 마귀의 이마에 다시 성수를 찍어 바르며, 신부는 입속으로 성가를 중얼거렸다. 그가 맞이하게 될 새로운 괴물, 저와 같은 붉은 태아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피를 뒤집어쓴 채 골목길에 서 있던 부제는 비명이 터지는 집 안을 말간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이끌리듯 무겁게 한 발, 두 발 움직이던 발은 종래에는 뛰다시피 계단을 오르고, 문을 열었다. 문밖에서 작게 흥얼대던 성가는, 제 박자를 잃은 채 무질서하게 불리고 있었다. 부제는 그런 가벼운 광경과, 재림하듯 구겨진 시체를 바라보고 침을 삼켰다. 왔느냐. 가벼이 불리는 제 이름과 호칭이 이리도 눈물겨운 건, 저 스스로가 책임지거나 겪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인지, 혹은 제 몫을 못하고 끝나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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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신아, 나도. 담배 끄트머리로 자신의 정수리를 쿡쿡 찔러대는 신부에, 부제가 고집스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술 끝에서 하얀 베일이 한 번 퍼지고 나서야, 부제는 그의 사제의 연초에 빨간 끝을 맞대었다. 오래되어 이제는 단종된 담배를 골라 피는 신부는 매캐한 내를 그에게 불어댔다. 맛있고 좋네. 그렇지? 뒤이어 목덜미를 핥듯 붙어오는 숨소리에 그는 신부의 품을 벗어났다.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끈 그는 자기 스승에게 그것을 내밀어 끝내는 자신을 희롱한 담배가 하얗게 화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부제가 그것을 다시 식탁에 올려두고 뒤돌아서서, 팔 벌린 그의 스승을 무시하고 지나쳐 셔츠를 껴입는 것 또한, 신부가 부제를 희롱한 벌이었다.


지극히 성실하게 미사 준비를 하던 그에게, 신부가 말을 던졌다. 여동생이 있다 그랬던가. 본당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단어마다 연기를 뿜어내는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그는 신부를 지나치며 그의 입에 물린 담배를 뽑아 꺾었다. 예, 있습니다. 제대로 불을 끈 담배꽁초가 쓰레기통에 직행하여 쓰레기들과 뒤섞이는 걸 바라본 후에야 그는 신부를 바라보았다. 몇 살이냐?


범신은 그때 이후로 그렇게 날뛴 적이 없었다. 그때 부순 쓰레기통 조각과 흩뿌려진 것들을 스스로 정리하며, 그는 자기 스승이 제대로 된 인간말종이라는 교훈을 얻었더랬다. 그 이후에 신부는 부제를 놀릴 때 특히 그의 여동생을 건드리고는 했는데, 이가 잘 먹혀들어 부제는 한동안 그 손바닥 위에서 놀았으나, 무시라는 대처방안을 떠올린 후로는 그러한 놀림은 사그라든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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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희롱과 조롱은 일정한 규칙이 있었는데, 범신은 꼭 그것을 나중에 문뜩 깨닫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것은 꼭 범신이 무뎌질 때 쯤, 범신 스스로보다, 준호가 먼저 알아채어 그만두곤 했는데 그날은 유난히 준호에게서 말이 많았다. 평소와 같이 담뱃내가 풀풀 올라오는 그의 보송보송한 턱이 범신의 어깨를 짓누르고는 제 뜻 좋을 대로 지껄였는데, 범신은 마음속으로 수십 번이나 자신을 누른 그의 아래턱을 부수는 상상을 했다. 평소보다 진득하게 맞붙어 오는 숨소리에 젊은 혈기 따라 취할 뻔하다가도, 그의 비꼬는 말투만 들으면 속에서 다른 종류의 열이 올라오며 그를 뿌리치고는 말았다. 그러나 그의 어깨를 떠민 그날의 최 신부는 평소와 달리 조금은 섭섭한 얼굴로 범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잘못 드셨습니까, 아님 또 놀리시려고요. 투덜대듯 자신의 옷을 눌러 펴는 김범신은 고의로 따가운 시선을 피해 자리를 뜨려 했다. 그의 뒤로 다가온 신부는 그런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려 그 머리통을 범신의 목덜미에 파묻었다. 그 손가락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앙상하고, 자신의 목에 닿는 얼굴 또한 너무나 차가워서... 그래서 범신은 그의 신부를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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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받는 날이었던가. 그리도 편안하게 웃는 사람인 줄은 몰랐었는데, 그날, 그 자리에서 범신은 그의 주신과 함께 낭만적인 반짝임 또한 가슴에 머금었다. 그랬기에 오히려, 그러한 농담들을 넘기지 못하고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되리란 걸 범신은 내심, 무의식적으로 알아차렸다. 자신의 시선을 알아채고 마주한 채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웃는 남자가 하느님만을 품은 가슴과 머리에 새로운 대못을 박아 넣고, 자신을 역십자가에 매달아 세우리란 것 또한.


범신아, 생리하니. 이전과 달리 더욱 예민하게 구는 자신을 정확하게 꿰뚫는 시선에 범신은 몸을 떨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십쇼. 사제관으로 도망치다시피 하는 발걸음에도 감정이 묻어나는데, 저 치가 모를 리 있겠는가 싶었다. 그렇기에 그런 소리를 한 걸 테고,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말이었겠지. 그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범신은 작게 울었을지도, 눈가를 벅벅 긁었을지도 모르지만 범신에게 달리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음에. 그저 어슬렁 따라 나온 그의 스승이 하자는 대로 다시 한 번 범신을 끌어내리자 그대로 무너지는 것 이외에, 뒤집힌 십자가에 사지 묶인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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뮨른 전력 =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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