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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아재

그래상식영후 :: 광구








같은 삐에로 장식을 다섯번 보았을 때, 그래는 자신이 길을 잃었단 걸 깨달았다. 그래의 앞에 놓인 막막하게도 넓은 복도는 그가 이 집에 살면서도 처음 와본 곳이었다. 그래는 이 집에 산 지 오늘로 1년이 다 되었지만, 그에게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무작정 복도를 달려 마주한 정원의 벽에 그려진 나무 모양 띠장식이 너무 멋있어서, 그것을 따라오다 보니 처음 보는 하얀 저택으로 들어온 것이 애초에 잘못이었다. 사람 하나 없지만, 아주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는 저택에 갇힌 그래는 내려갈 길도 찾지 못한채 창가에 앉았다. 이곳은 그가 온 고아원과도 비슷했다. 죽을 아이들이 모인 그곳은 어린아이들의 기운이 아닌, 병자들이 데리고 있는 저승사자들만이 떠도는 정적만이 가득하던 공간이었다. 상반되게 그래의 방이 있는 본 저택은 늘 무언가 들떠있었다. 그래는 그런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늘 어디론가 쏘아 다녔고, 드디어 그의 꿈의 공간을 찾은 것이다.

저택 내부는 무척이나 깔끔했지만, 창문은 밖에서 진흙이라도 비빈 것인지 무척이나 탁해서 밖을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래는 그 마저도 좋아, 그 창틀에 앉아 다리를 까딱거렸다. 그 탓에 풀 조각이 으깨져있는 그의 신발창에서 고운 흙더미가 부서져 내렸다. 짙고, 붉은 카펫이 더러워졌으나, 그래는 그 마저도 이 고요에 묻어 두기로 했다. 누군가는 이곳을 청소하다 그래가 있었단 걸 알게 되겠지만 그때는 길을 잃었다 말하면 되었다. 실제로 그래는 돌아갈 길을 모르고 있었다. 일부러 찾지 않았다 해도 정말 모르고 있으니, 이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는 본 저택에서처럼 쿠당거리며 걷지는 않았다. 이는 주인이 누군지 모를 이 저택에 대한 배려였다. 빈 저택이라해도, 주인은 있을 테니. 잠깐 빌리는 사람으로서 약간의 죄책감일까. 만약 그 주인이 자신을 데려온 그 할아버지에 가까울 나이의 아저씨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 사람 앞에서 그래는 늘 바둑을 두게되니, 책잡힐 만한 수는 안 두는 게 좋았다.

빙글대며 돌아가는 문고리를 열고 어느 방을 열자, 그곳은 아주 넓은 침실이었다. 창에 두꺼운 커탠이 쳐져있어 불을 켜자,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 잡은 것은 침대였다. 남성의 것인지 단색으로 되어있는 침대는 실존하는 가장 큰 사이즈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고, 양모로 짠 듯한 카펫을 밟아 들어가자, 단조로운 실내가 본 적이 없음에도 익숙했다. 침대 옆에 있는,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거울이 달린, 왜 있는 건지 모를 빈 화장대 위는 먼지가 가득했다. 저택이 그러하듯 깨끗한 실내였는 데, 왜 화장대에만? 그래는 그 앞에 놓인 쇼파에 앉았다. 그러나 사용감이 없는 쇼파는 그래를 불편히 튕겨냈다.

방에서 나와 주륵 달린 문고리를 하나씩 열어보았다. 신기하게도 본 저택과 달리 사용인의 침실은 하나도 없었다. 1층에는 주방과 홀 밖에 없었음에도, 2층에는 창고들과 옷방, 화실과 서재, 그리고 온갖 보석이 전시되어 있는 곳. 이 저택에는 남성의 침실 만이 있었으나, 옷방에는 여성의 옷과 남성의 옷이 반반씩 들어있었고, 화실에는 어느 여성의 초상화가 가득했다. 서재는 로맨스 소설이, 보석들은... 그래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번쩍이는 금, 은들로 만들어진 여성형 목걸이와 팔찌. 그리고 그것들의 길이는 무척이나 길었다. 남성도 쓸 수 있을 정도로. 위화감은 지속 되었고 그래는 혹시나 하고 다시 옷방을 찾아 들어갔다. 꺼내든 여성복들의 사이즈는 무척이나 커서, 그래가 입기에도 넉넉해 보였다. 하얀 원피스 하나를 자기 몸에 대어보던 그래는 그 것을 조심스레 다시 옷걸이에 걸었다.

천천히 1층으로 내려오며, 그는 이곳의 이상성이 점점 마음에 들었다. 해가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진흙 발린 창이, 저녁 노을을 맞아 탁한 오렌지색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층 전면유리를 향한채 계단에 앉으며 그래는 이 저택의 주인을 기다렸다.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여장에 취미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장소를 만든 이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늘은 쉽게 어두워졌으나 그래는 램프 하나 들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기다렸다. 햇빛에 비히면 너무나 미약한 달빛은 견고한 빛의 보호막을 이기지 못하고, 한 점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낮 동안 후끈했던 실내는 급속도로 식어갔고, 대리석에 엉덩이를 비비고 앉아 있던 그래의 체온 또한 실내와 같이 가라앉았다.

갑자기 쏟아진 빛은, 비록 달빛이었으나 거의 맹인이나 다름 없는 상태였던 그래에게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미적거리다 꼬박 잠이 든 그래는 입가를 닦으며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자신을 본 것인지 어떤지, 편안해 보이는 가죽 옷을 입은 어느 사내가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정문 앞에 앉아 있던 그래는 피하지 못하고 그를 살펴보았다. 그것도 빛이라고, 그래의 눈을 괴롭히던 빛은 그 남자의 뒤로 비춰 그의 얼굴을 알려주지 않았다. 뻗은 머리와, 지저분한 신발을 보아 그리 외견에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밖에. 그래는 그 남자가 자신을 보고 있단 걸 알았지만 그의 빛나는 눈 때문에, 그 시선에서 피하지도 못한 채 꼼짝 못하고 서있었다.


그것은 마치 계시와도 같았다. 그래는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어떤 사람도 그런 강렬한 경험을 하고, 그에게 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길이 든 가죽쇼파의 손잡이에 머리를 기대며 그래는 상식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자신의 몸에 대어보던 하얀 원피스. 상식은 외출복을 벗고 완전한 전라 위에 그 원피스를 입었다. 두시간 후면 이 저택의 주인이 쳐들어 올 것이다. 그 전에 나가야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 따라 그의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던 탓에 그래는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 된단 걸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상식에게 상처가 될 터이기에 그래는 잠자코 그가 돌아보길 기다렸다. 그러나 상식은 그 차림으로 어딜 나갈 수도 없으면서 한번도 그래를 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래는 자신의 팔에 스스로 얼굴을 묻었다. 이 저택을 오기 위해 지나는, 멋진 벽 장식이 있는 정원에서 걲어온 국화가 그의 침실을 채웠으나, 이 또한 곧 사라질 터이다.

자신처럼. 이 모든 주택의 주인인 그 남자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설 수 있다면 왜 상식을 붙잡는 것인지, 그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상식의 문제를 제쳐두고라도 자신의 거취가 불투명해지는 시점이었다. 다시 고아원에 돌아갈 수도, 후원을 받으며 혼자 살 수도 있었으나, 그래는 그 모든 경우의 수를 치워두었다.상식을 보지 못하게 되는 선택지는 그래의 안에서 모든 빛을 잃었다. 애초에 상식을 제쳐둘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큰 내기 바둑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 문을 열고 나갔다. 아랫층 계단에서 서성이던 상식은 문소리에도 그를 올려다 보지 않았고, 그래는 마음껏 쿠당거리며 내려와 그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의 저택을 떠나며 상식에게 오늘 그 남자는 오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을 했다. 확신했다. 오늘부로 이 저택은 자신의 것이었다.









중세인지,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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